09년 하얼빈 역의 총성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영웅적 쾌거만을 기억하며 일종의 민족적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그 총성이 핍박받던 조선 민중에게 선사한 시원한 맛 이면에, 정작 우리가 ‘인간 안중근’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소설가 류기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편협한 아전인수(我田引水) 식 역사관을 깡그리 소탕하고, 가장 객관적이고도 입체적인 시각으로 안중근을 복원해낸다.
류기성 작가는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민족주의적 열광의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특별한 화자(話者)를 소환한다.
바로 감옥에서 안중근을 가장 가까이서 감시하고 지켜보았던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다.
적국의 죄수와 간수라는 사슬로 묶여 있던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교감은, 안중근이라는 인물이 지닌 본질적인 위대함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열쇠가 된다.
간수 치바의 시선: ‘폭도(暴徒)’에서 ‘성자(聖者)’로의 경이로운 전환
류기성 작가의 작품이 지닌 가장 중대한 가치는 안중근을 박제된 영웅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인격체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는 처음에 안중근을 이토를 살해한 ‘폭도’이자 ‘테러리스트’로 간주했다. 이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국민에게 주입한 전형적인 세뇌의 알고리즘이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안중근이 보여준 의연함과 동양 평화에 대한 고결한 신념은 치바의 편견이라는 거미줄을 단숨에 끊어버렸다.
치바는 안중근이 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글귀와 그의 온화한 성품에서 일본인이 그토록 숭상하던 무사도보다 더 깊은 인류애를 발견했다.
적국의 군인이 적국의 죄수 앞에 무릎을 꿇고 평생 그의 위패를 모시며 참회하게 된 이 이율배반적인 인연의 전환은, 안중근의 인간성이 이념과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였음을 웅변한다.
작가 류기성은 이를 통해 우리가 흔히 ‘폭도’라 명명했던 역사적 희생자들이 사실은 얼마나 거대한 정의의 열쇠를 쥐고 있었는지를 다시금 묻는다.
일상의 품격과 동양 평화의 길
류기성 작가는 안중근이 옥중에서 보여준 소소한 일상의 태도에 주목한다. 죽음을 앞둔 극한의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글을 쓰며 기도를 올렸던 안중근의 모습은, 진정한 양생(養生)적 삶의 극치라 할 만하다.
안중근에게 옥중 생활은 단순한 구속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완성하고 타인을 감화시키는 마지막 여행지였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죽은 자’가 저지른 침략과 학살의 죄악을 안중근은 총탄으로 심판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꿈꿨던 것은 피의 복수가 아닌 상생의 알고리즘이었다.
치바 도시치라는 일본인 간수조차 자신의 인연으로 품어 안았던 안중근의 넉넉한 도량은 오늘날 갈등과 증오로 점철된 우리 사회에 중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류기성 작가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예의와 인연의 소중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옥중에서 쓴 불멸의 문장, 치바의 마음을 흔들다
류기성 작가의 묘사 중 가장 압권인 대목은 안중근이 형장으로 떠나기 직전 치바에게 건넨 글씨들이다.
치바는 안중근의 글씨를 받으며 오열했고, 안중근은 오히려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적국의 간수에게 건넨 이 한마디는 치바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치바 도시치가 전역 후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안중근의 사진과 글씨를 모시고 매일 아침 차를 올렸다는 사실은, 안중근의 승리가 단지 하얼빈의 총성에 그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적의 영혼마저 구원한 진정한 정신의 승리였다. 류기성 작가는 이 기적 같은 인연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만남이 사실은 역사의 안개를 걷어내는 중대한 빛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류기성 작가는 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결과를 탓하기 전에 그 원인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패권적 제국주의를 추구한 일본의 나쁜 정치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사상이나 주의가 선량한 국민과 주변 국가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
그는 이어 “물론 론,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전쟁은 영원히 피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함께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116년의 시간을 건너온 진실의 열쇠
류기성 작가의 이 기록은 안중근 의사를 단순한 독립운동가로 가두지 않는다. 대신 가장 객관적인 타자의 눈을 통해 그의 ‘인간적 품격’을 복원해낸다.
안중근이 처단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라는 개인이 아니라, 타자의 생존을 짓밟는 탐욕의 사슬과 조작된 이데올로기였다.
이제 우리는 안중근이 건네는 진실의 열쇠를 들고 우리 내면의 편견을 걷어내야 한다. 아전인수식의 편협한 역사 인식을 넘어, 적조차 감화시켰던 그의 위대한 인간성을 우리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116주년, 류기성 작가가 빚어낸 ‘인간 안중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장 중대한 역사의 선물이 될 것이다.
평화는 칼날 끝이 아니라, 안중근이 치바에게 보여준 그 깊은 예의와 인연의 회복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