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이는 시간이다.
흐르는 시간은 육체에 흔적을 남기고 고이는 시간은 가슴에 흔적을 새긴다.
그 어떤 시간으로부터도 달아날 수 없는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해간다. 낡아가고 사라져간다. 시간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8쪽)
해금의 흐르는 시간 속에는 사랑하는 아들 건일(켄)과 손녀 미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비운으로 생을 마감한 부모님과 백년가약을 맺었던 한태주, 하나뿐인 남동생 기영은 일찌감치 해금의 곁을 떠나 고이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기술이나 실력은 일본이 한 수 위야. 거기에 비하면 한국은 운이 좋은 거고. 일본은 아시아 최강이야. 그리고 세계 문명의 초일류를 이끄는 나라 중에 하나고. 한국은 우리의 식민지였던 나라야. 참 성가신 나라지. 우리가 너무 키워준 게 화근이라고 생각해.” (203쪽)
재일동포가 일본 사회에서 계는 배신감의 전형성이 미유의 애인인 지로의 대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리 친했던 사이라도 상대가 한국인임을 알고 난 일본인들이 어떻게 표변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이요? 제가 어떻게 한국인인가요? 한국말? 저 다 잊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일본인입니까? 천만에요, 일본인인 척 연기를 하면서 살뿐이죠. 그까짓 피가 뭐라도 된답니까? 제 인생을 얼마나 아십니까? 생명 하나 준 것으로 생색냈으면 됐습니다. 그 생명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알기나 합니까? 일본 땅에서 일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려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디딤돌이 아닙니다. 걸림돌일 뿐이죠. 그것이 현실입니다.” (284쪽)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는 천년만년 살 줄 알았다. 켄은 기억을 헤집어봤지만 어머니의 기침 소리 한 번 들은 적이 없었다. 위험 앞에서 단 한 번도 몸을 사린 적 없이 언제나 당당하고 강인하게 살아온 어머니만 기억나는데, 폐암이라는 몹쓸 병에 걸렸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300쪽)
켄은 해금과 화해할 기미는커녕 도리어 딸인 미유에게 미치는 사소한 한국적인 영향력을 차단하기에 바빴다. 그렇게 완강했던 그가 해금이 비소세포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무너지고 만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과 동생을 데리고 기미가요마루라는 커다란 연락선을 타고 제주를 떠나오는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던 거야. 우리 식구들은 일본에서 돈 많이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자고 약속했거든. 그러니까 아직도 여행 중인 셈이잖니? 참 길고도 긴 여행이지.” (314쪽)
해금은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삶이 길고 긴 여행이었음을 피력한다.
◆ 추천평
소설들이 서사성(이야기)을 읽고, 그에 따라 독자도 잃고 트리비얼리즘의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것이 요즘의 경향인데,《검은 모래》는 소설에서 서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입증하고 있다. 앞으로 제주4·3평화문학상이 한국 소설의 서사성 회복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심사위원 : 현기영, 김병택, 윤정모, 임헌영, 최원식
《검은 모래》의 서사는 크고 강하다. 섬 중의 섬, 제주도의 우도 출신 한 해녀 가족이 일본 바다로 출가물질 갔다가 도쿄 남쪽의 어느 화산섬에 정착하면서 시작되는 해녀로서의 신산한 삶과 제일 조선인으로서 겪는 민족차별, 모국의 분단 상황에 의한 이념적 갈등 등의 내력 이야기가 매우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 현기영(소설가)
구소은의 장편소설 《검은 모래》는 일련의 디아스포라 소설들과 같이 동아시아의 역사적 부침 속 개인의 삶의 궤적을 쫓으면서도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헤집어내기보다는 공존과 평화를 전망하는 작가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다. 제주 출신 재일동포 작가들의 역사적인 증언의 문학이 한국 현대민중운동사에 닿아 있어 여전히 그 상처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검은 모래》는 해녀의 일본 유민 생활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한일 공존의식을 추구하고 있다.
- 임헌영(문학평론가)